인간은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 고통(pain)을 받으며 살아간다. 고통에는 튀르키예 지진 같은 자연재해나 이태원 참사와 같은 인재로 인한 고통, 질병으로 인한 신체적·생리적 고통, 우울이나 불안 등 정서적인 문제로 인한 고통, 가족관계나 대인관계의 갈등으로 인한 관계적 고통 등이 있다. 인간에게 고통은 보편적이다. 다른 사람들은 고통 없이 잘살고 있는데, 나만 큰 고통을 겪고 있다는 생각이 불행감에 빠지게 한다. 누구나 고통을 겪고 산다는 점에서 ‘인간은 비슷한 처지다’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상담장면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우울, 불안, 분노, 죄책감, 수치심, 외상 등의 정서적인 고통을 겪고 있다. 그분들은 그런 고통에서 벗어나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해 왔다. 하지만 오히려 고통이 더 심해지는 경우가 많았다. 늪에 빠져서 나오려고 애를 쓰면 쓸수록 더 깊이 빠져들어 가듯이 고통에서 벗어나려고 애를 쓰면 쓸수록 더 심각한 고통을 겪었다. 고통을 통제하고 벗어나려는 과도한 노력은 더 큰 고통을 가져온다. 이런 고통을 괴로움(suffering)이라고 부른다. 신경증(neurosis)이 그런 괴로움에 속한다. 신경증은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겪을 수 있는 고통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지나치게 극복하려고 애를 쓰다 생기는 것이다.
고통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피할 수 없는 것이라면, 괴로움은 피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정신적으로 건강하게 살아가려면 피할 수 없는 고통은 받아들이고, 피할 수 있는 괴로움은 겪지 말아야 한다. 살아가면서 원하지 않지만 피할 수 없는 고통을 ‘존재의 고통’(pain of presence)이라 부른다. 앞에서 언급된 여러 가지 종류의 고통은 ‘존재의 고통’에 해당한다. 반면, 피할 수 있는 고통을 ‘부재의 고통’(pain of absence)이라 부른다. 이것은 ‘존재의 고통’으로 인해 일상생활에서 참여하지 못하고 회피하는 활동들을 말한다. 존재의 고통을 회피하려고 애쓸수록, 부재의 고통으로 인해 더욱 괴로워진다. 예를 들어, 누구나 사람들 앞에서 발표할 때 긴장하고 목소리가 떨리고 얼굴이 빨개질 수 있다. 이것을 너무 창피하게 생각하고 지나치게 통제하며, 다시는 그런 일을 겪지 않으려고 얘를 쓸 때 사회공포증이 생긴다. 사회공포증으로 인해 일상의 인간관계나 집단활동이 두려워서 모임에 참여하지 못하게 된다. 이것이 ‘부재의 고통’이다. 이로 인해 그 사람은 더 위축되고 외로워지는데. 이것이 괴로움이다. 괴로움은 흔히 더 큰 괴로움으로 확대된다.
‘존재의 고통’을 수용하면 ‘부재의 고통’으로 인한 괴로움을 겪지 않을 수 있다. ‘수용’은 판단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을 말한다. ‘사회공포증’으로 고통을 겪는 사람에게 수용은 사회적 상황에서 공포를 느껴서는 안 된다고 억압하거나 공포를 느끼는 자신을 심약한 존재로 판단하지 않고 ‘나도 공포를 느낄 수 있지“라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수용은 자기 자신이 ‘두려워하는 나’를 비판단적으로 관찰할 때 가능하다. “비판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마 7:1) 이 말씀에서 비판은 자기 자신이 재판관이 되어서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것을 말한다. 성경은 우리를 판단할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라고 말한다. 불행하게도 우리는 다른 사람들뿐만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판단하는 데도 매우 익숙하다. 특히 마음이 힘들 때 우리 자신을 판단하고 비난하기에 십상이다. 수용되면, 고통을 옆에 놔두고 현재의 삶에 집중할 수 있다. 즉, 고통스러운 현실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목표나 소중히 여기는 가치와 일치하는 행동을 선택하고 수행하는 데 자신의 에너지를 사용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고통의 수용은 현재를 살아가는 힘이 된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고통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일 때, 괴로움의 고리에 빠지지 않을 수 있다. 그리고 고통 속에서도 자신의 목표나 가치 있는 일을 추구하며 살아갈 수 있다. 고통의 ‘수용’을 통해 우리는 고통의 때에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기로 선택하며 흔들림 없는 신앙생활을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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